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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3월 30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날에, 창원 교보문고에서 우연찮게 책을 샀다. 처음 보는 작가의 책이었지만 붉은 책등에 커다랗게 느껴질 만큼 정갈하게 박힌 하얀 글자들의 나열이 마음에 들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그 날이 마침 3월 끄트머리에 가까워져 오는 날이기도 했고, 대체 어떤 내용의 책이길래 이리도 의미심장한 제목을 쓴걸까, 제목에 대한 호기심도 책을 고르는 데 한 몫을 단단히 했더랬다.


 그리고 그 선택은 후회스러울만큼 적확하게 내 취향에 저격하고 말았다. 우스울만큼 우연스럽게도, 그러나 어떻게 본다면 운명적으로 그 축축한 삼월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그 책을 만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 낭만적이면서도 모호한 제목을 지닌 책의 내용은 뜻밖에도 매우 정교한 퍼즐을 마주한 느낌을 준다. 말 그대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에 대한 4가지 에피소드가 액자식 형태로 독자에게 주어진다. 마치 딸기 생크림, 초콜렛, 치즈, 녹차 크림의, 네가지 조각(지극히 읽는 사람의 취향인 케이크지만)이 훌륭한 하나의 케이크를 만들 듯 얼핏 전혀 달라보이는 네 가지 이야기가 이 책을 구성하는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기다리는 사람들에서는 부유한 자산가들의 모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작가 나름대로는 중산층이라고 주장하는 듯한)에 강제 소환 당한 평범한 샐러리 맨, 다만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까마득히 높고도 나이차도 많이 나는 상사와 그의 친구들의 모임에 초대 당한 불쌍한 남자의 이야기가 그 소재가 된다. 처음 읽었던 때야 학생이었으니까 대체 저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감도 안 잡혔지만, 이제 돈의 노예이자 직장의 노예가 된 나로서는 정말 그 짧은 휴일을 굳이 반납해야 하는 주인공 가메시마가 정말 눈물겹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망할 새끼 하고, 자기를 추천한 상사 에비사와의 뺨을 치자니 내 돈줄 ㅠㅠㅠ ㅋㅋㅋ 아이고 *발 세상에 마상에. 다행인 건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고 네 명 다 독서가 취향이라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게 한 줄기 빛이긴 하지만 내 금쪽같은 휴일을 없애버린 에비사와 자식이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건 직장인들 모두 공통으로 느낄 바라고 감히 예상해본다. 그래서 어쨌거나 그 다섯 사람이 기다리는 건 무언가 하면, 바로 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이 책에는 독특한 규칙이 있는데 바로 한 사람에게 단 하루만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책 주인과, 이 책 주인이 인정한 단 한 사람만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오직 하룻밤 동안에만.


 여기까지만 읽어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잔혹한 조건에 나는 매료되었고, 그 이후가 궁금한 사람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특히나 삼월, 바람이 많이 불고 촉촉하다기 보다는 축축한 비가 내리는 오후에 읽어본다면 딱 좋겠다.


 나머지 세 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궁금하면 읽어보는 게 가장 좋겠지. 물론 몇 번 읽다 보면 중간 중간 눈에 걸리는 사소한 오류들은 있지만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인지라 처음 읽을 때에는 술술 넘어가버린다. 그게 또한 온다 리쿠가 써내는 글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고.


 아무튼 거의 내 최애나 다름없는 이 책을 읽은 뒤 한참 후에야 나는 술을 배우게 되는데 ㅋㅋㅋㅋㅋ 20년 동안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세상 즐거움의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살이 된 직후 나를 다른 길로 인도해주는 나쁜 남자 같은 물건을 만나게 되는데, 그 놈이 바로 술이다. 가장 좋아하는 건 맥주지만 사실 맥주는 물 같은 놈이고, 양꼬치에는 이과두주, 연태고량부터 시작해서 뽀오얀 것이 술맛나게 하는 막걸리, 온 국민의 이슬인 참이슬, 멀리 서양 물 먹은 양주까지 싫어하는 술은 딱히 없다. 오직 좋아하거나, 더 좋아하거나. 병신 같지만 사실인걸... 참고로 나는 술을 좋아할 뿐 잘 아는 건 아니다 ㅋㅋㅋㅋㅋ 아니 *발 있으면 마시고 마시고 취하는 거지 거기에 발효 등급이 어떻고 자시고는 ?? 그 말 할 때에 술이나 한 잔 더하겠다라는 마인드로 세상을 살다 보니...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고른 술은 꼬냑이다. 내가 처음 마셔본 꼬냑은 우리 형부가 선물로 준 '조니 워커 블루 라벨'이 너무 기쁜 울 아버지가 본인만 홀짝 홀짝 드시던 꼬냑을 우리에게 까주신 것이 시초였다. 처음은 완전 신세계... 40도가 넘어가는 주제에 겁나 목구멍을 비단구렁이마냥 는실난실 넘어가는 그 맛에 정신이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에게 아버지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만찬에 꼬냑이 들어간다며 2잔을 주시는데, 그 이후로는 얄짤이 없으셨다고 한다...(시무룩


 그런 부분이 비슷하다. 잔혹하고, 짙은 주제에 매혹적이다. 먹으면 홀리는 걸 알면서도 호박색, 그 색상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고 풍겨오는 농밀한 향기에 어쩔 수 없이 잔을 들게 된다. 그리고 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하면 목을 넘어가는 부드러움에 감탄하면서 멈출 수가 없게 된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인 만큼 진도 홍주 같은 빨간 술이 어울리려나 했지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나오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창백하면서도 독기 어린 미소녀가 등장하는 이 책에는 꼬냑이 제격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이 7월이라 아쉽지만 오크 통에 넣어둔 술이 익혀지는 걸 기다리듯이, 나도 내년 3월을 기다리며 한껏 기대감을 고조시켜볼까한다. 그 전에 2/3이 남은 저 꼬냑은 먼저 마셔버리고 새 꼬냑을 사둬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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