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진짜 무식하고 교양 없는 이야기이고 말을 꺼내기조차 면구스럽지만 어렸으니까-, 그때는 그 얇은 시집을 한 권 사느니 책을 한 권 더 사겠노라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모자라고도 무지한 생각임을 몇 년 전이나마 깨달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나희덕, 유희경, 임솔아, 박준, 허수경. 훌륭한 시인들이야 넘치도록 많지만 나를 처음 시의 세계로 이끌어 준 몇 명을 꼽자면 저 사람들이 되겠다. 우스운 일이긴 하다. 활자 중독이라고 불릴 만큼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시는 그닥 가까이 하지 않았다니. 아마도 고등학교와 재수 시절 진저리나게 풀었던 문학 문제집 덕일 거라 책임을 미뤄본다. 이상 시인을 지금은 싫어하지 않지만 문제집이나 교과서에 나오는 오감도는 진짜 감옥에 넣어야 할 시다. 샹.....
그랬던 내가 박준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아마도 도서관 신작 코너에서였던 것 같다. 나희덕 시인의 ‘푸른밤’ 이후로 부쩍 시집 코너에 자주 들리게 되었는데 그날따라 그 제목이 끌렸더랬다. 그 자리에서 두 어 편을 읽고, 200~300쪽 짜리 소설 1권은 단숨에 읽어 내리는 내가 그 시집 한 권을 닷새에 걸쳐 아껴가며 읽었다.
청일하고 단려하다. 여아하면서도 다정하다.
박준 시를 읽으면서 생각났던 단어들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의 풍경이 그리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보는 사람의 눈이 따뜻하기 때문이다. 나를 향해 다정히 웃어주는 연인의 미소가 미인인 까닭이다. 그래서 내가 더 이 책을 아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훌쩍 커버린 나에게는 결여된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아니 남아있다 못해 나에게까지 기꺼이 나누어 주기에. 나 또한 내 기억 속 수많은 미인들의 동그란 어깨를 박준의 시 속에서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는지 모르겠다.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구절은 ‘마음 한 철’의 ‘한 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어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였다. 물론 여러 개의 시와 구절들이 마음을 할퀴듯 오래 잔상을 남겼으나 퍼뜩 입 속을 구르는 구절은 그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사람에게 전부를 받지는 못했지만, 스치듯 지나가던 그 사람에게 내 전부를 꿈꾸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것 외에도 절절하게 심장에 닿아오는 구절들은 더 많고, 직접 읽는다면 더 색다르게 느껴질 거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민들레 대포를 골랐다. 좀 더 맛이 맑으면 좋겠지만 이름이나, 맛으로 보나 이 시집에는 민대포라고 생각했다. 민들레 대포, 상표에는 말갛게 고개를 내민 민들레가 예쁜 이 술은 맛도 좋다. 내 입맛에는 좀 단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볍고 깔끔하다. 목 넘김도 부드러워 친구들과 마시다보면 어느 새 서너 병이 훌쩍 넘어가 있는 앉은뱅이 술. 마치 무심하게 넘기다가 어느 새 푹 빠져버리게 되는 어떤 좋은 시집처럼.
민들레하면 떠오르는 기본적인 이미지는 소박함, 단촐함. 어딘지 모를 정겨움. 이런 것들이겠지. 나 또한 이 민들레 대포라는 술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이름만으로도 호감을 느꼈다. 어렸을 적에는 단 걸 더 좋아했으니 그 맛도 더 좋게 느꼈던 기억도 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는 데가 자주 없어서 꽤 오래 마시지 못했던 술이었지만 이 책을 어울리는 술을 고심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술이 떠올랐다. 나로서는 꽤 만족스러운 매칭이다.
중국으로 장기 출장을 넘어온 우리 집에는 아직도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가장 바깥쪽으로 세워져 있다. 가족이 그립거나, 떠나온 옛 추억의 한 귀퉁이가 어딘지 모르게 진하게 아쉬운 날에는 나도 모르게 그 시집을 펼쳐 아무 구절이나 읽어본다. 읽다 보면 저절로 마음 한 모퉁이부터 그리운 온기가 노랑으로 느릿하게, 그러나 착실하게 번져온다. 나는 그 온화함 속에서 오래 그 시집의 온기에 취하는 것이다.
번져오는 마음 한 철에게 노란색 민들레 대포 한 잔을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전부를 쥐어줄 것처럼 다정히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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