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왔다. 어릴 땐 마냥 비 오는 날이 좋았다가, 나이가 좀 드니 비 오면 무기력해지는 그 기분이 싫었다가, 이제는 축축이 젖어드는 그 감성과 다정하게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좋아지니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람이 삭막해지기만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전에 막걸리다.
그러고 보니 진짜 어이없지. 중국에는 막걸리를 잘 안 판다. 어쩌다 가게에 있어서 사먹으려 보면 한 병에 칠천 원 만원까지도 간다. 세상에, 칭따오 맥주 한 병이 팔백 원인데... 그러다보니 휴가 기간에 한국에 오면 기를 쓰고 막걸리를 먹으려고 했었다. 막걸리. 막 걸러서 만들었다는 그 술은 자태부터 이름과 다르게 참 곱지 않나? 그 뽀얀 색깔을 보면 어릴 적 ‘아침햇살’을 마시면서 몰래 어른 흉내를 내던 내가 떠오르고, 어딘지 모를 미묘한 그리움이 번진다. 그런 막걸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술답게 종류도 참 다양하더라.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지평 막걸리부터 시작해서 느린 마을 막걸리, 담양 대대포, 제주 발효 막걸리, 공주 알밤 막걸리, 그리고 오늘 얘기하고 싶은 천둥소리 막걸리까지.
천둥소리 막걸리는 전주의 대표적인 막걸리다. 전주하면 모주 아니냐고? 맞긴 한데, 모주는 또 막걸리랑은 다르잖아? 모주는 또 따로 어울리는 책이 있을 것 같으니 오늘은 생략 ㅋㅋㅋ 사실 천둥소리 막걸리는 내가 거진 사오년 전 먹은 막걸리니 기억을 더듬으려니 참 힘들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천둥소리 막걸리를 고른 이유는 그 이름과, 대표적 장소와, 내게 ‘비’하면 떠오르는 작품과 잘 어울리는 탓이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고, 그리 강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핏 베란다의 큰 창을 열어보니 온 세상은 잠든 채, 커다랗고 빨간 우산을 든 한 사람만 조용히 숨을 내뱉어 하얗게 입김이 서리고 있는 아주 고요한 광경이 내 눈에 박혀들었다. 모든 소란이 빗소리에 섞여 귀에 감겨드는 리듬 같은 날 내게 으레 여러 권의 책이 떠오르는데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임솔아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그리고 나를 많이도 울렸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있다. 이름끼리 매치하자면 꿀벌과 천둥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읽어본 내 감상으로, 꿀벌과 천둥은 쏟아지는 별 타래와 우주의 이미지에 가까워서, 결국 고른 건 한강의 ‘소년이 온다’였다.
한강의 대표작이라고 하면 ‘채식주의자’지만, 술 취향보다 책 취향이 더 뚜렷한 나에게는 ‘희랍어 시간’과 ‘소년이 온다’가 오히려 훨씬 더 인상 깊었다. 그런 그가 쓴 작품이 지닌 이미지는 모두 다를지언정 한강의 문체는 한결 같이 참 어여쁘다. 정성들여 단어를 고르고, 자수를 놓듯 알알이 투명하고 청량한 문장을 엮어낸다. 데운 우윳빛보다 조금 더 따뜻한 막걸리의 색만큼이나, 톡톡 튀지 않지만 곱게 수놓인 입 속의 단어를 되씹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한강’이라는 작가가 언뜻 비치운다.
참, 이렇게만 써도 막걸리가 너무 먹고 싶은데 이 천둥소리 막걸리가 만들어진 곳이 바로 전주다. 전주와 나주를 묶어 전라도라고 하고, 전라도의 광역시가 광주고, 그리고 그 광주의 슬픈 역사를 쓴 책이 바로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이다.
굉장히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드는, 참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남매일신보의 사진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개처럼 끌려가고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도 한 마디도 쓸 수 없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이제는 죽어가는 언론의 귀감이 되며 동시에 붓이 가진 힘을 절감하도록 하는 그 사진은,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사실’을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있던 일을 있을 수 없게끔 만들었던 압력은, 그 자체야말로 이미 그 현실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정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공부하려 한다. 그러나, 정치를 몰라도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음은 안다. ‘소년이 온다’가 그리는 비극은 정치와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이 사람을 얼마만큼 비참하게 하는지, 또한 사람이 얼마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지 절망적일 만큼 슬프게 그려낸 소설이다. 그러나, 또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과연 이 글에 소설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년이 온다’ 속에 나왔던 사건들은, 아직까지도 이름 붙여지지 못한 수많은 ‘소년’들이 버텨야했던 실제의 현실이었을 테니까.
천둥이 오면 비가 온다. 천둥은 비의 조짐이다. 우리에게 잊히고 외면되었을지언정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민주주의의 현신은 사실, ‘누군가’들의 징조에 의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던 진실이었을 것이다. 세계를 무너뜨릴 것처럼 무거워진 흐린 하늘, 그 흐린 하늘을 내달리는 빛의 번개와, 머얼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로 우리는 비가 오는 것을 예감한다. 세상을 찢어발기는 천둥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곧 우리를 감싸 안는 비의 가락이 들려올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레 천둥소리 막걸리를 골랐다. 우리의 혼이 살아있는 술이자, 온 세상을 호령하는 천둥소리라 이름 붙인 이 술. 사실 막걸리는 고급진 술이 아니잖아? 술찌기미를 막 걸러 낸 술을 서민들 외에 마시기나 하겠냐구.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짓밟혀있던 들풀들의 소리이기도 하다. 언젠가 천둥소리에 비견할 만큼 커다란, 수많은 풀들의 아우성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세상을 완전히 바꾸게 될. 바뀐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는 감히 예견조차 하지 못했을.
이번에야말로, 너무 많은 말이 차올라도 글을 쓸 수가 없음을 알았다. 나는 참, 부끄러워야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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