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 연태고량
여류작가를 좋아한다. 섬세하고 담담하지만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문장들이 좋다. 물론 기성 남성 작가들에게도 그런 섬세함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여성들이 필연적으로 안고 있는 그런 세심한 느낌을 살리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편혜영과 천운영 작가님들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그 고등학생 시절, 얼마나 설렜던지. 그 계보는 최근 들어 김숨, 한강, 백수린, 최은영 작가님들로 쭉 이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구병모 작가님의 ‘파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병모 작가님은 위저드 베이커리로도 유명하던데, 내가 읽은 작품은 아가미, 그리고 이 파과, 다. 유명한 소설은 굳이 내가 찾아 읽지 않아도 워낙 다들 많이 읽으니까, 라는 생각에 잘 찾아 읽는 편은 아니고 특이한 제목에 끌려 읽는 경우가 흔한데, 이 파과와 아가미가 그랬다. 아가미를 먼저 읽었는데, 읽고 나서는 아, 이 작가분의 책을 몇 번 더 읽겠구나, 하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파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아닌가. 내 머릿속에 이미 주연은 김혜자 선생님이 하고 계신뎈ㅋㅋㅋㅋㅋㅋ 여성작가 중 하필이면 왜 구병모 작가님의 파과가 나왔느냐 하면 주인공이 바로 나이 든 여인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느와르 물을 좋아하는 편인데 여성 주연의 느와르 물을 본 적이 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파과’가 영화로 나왔으면 참 좋겠다하는 내 개인적 사담이었다.
그래서 그 파과를 무슨 술과 연결시킬까 꽤 고민을 했다. 맥주는 우선 안 된다. 그러기엔 너무 가볍다. 쌉싸름한 흑맥을 해주기에도 좀, 맥주 향기가 너무 시고 달다. 그렇다고 해서 저기 바다 건너 온 양주 종류도 알맞은 것 같지가 않다. 그럼 뭐랑 어울릴까 고민을 해봤더니, 연태고량 정도가 비슷... 하려나?
이미지는 동양. 아주 독살스럽고, 위험한 도수에다, 색은 맑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막상 까보면 향기는 부드러우면서도 달았으면 좋겠다. 사실 연태 고량은 마지막에서 좀 에러가 나지. 자극적인 알콜 향에 파인애플 향이 나서, 부드러운 향기는 아니니까. 그래도 그럭저럭 합격선이라고 진행해보려 한다. 아직 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으니 어쩔 것이냐. 얼마 남지 않은 올해에도 힘내서 더욱 다양하고 맛난 술을 마시는 수밖에.
파과는 한 여성 청부 살인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 본드 걸 같이 섹시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러나 눈빛만큼은 절제된 날카로움을 가진 여성 노인 청부 살인자다. 멋있지. 백세 인생, 정년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그 모습은 진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농담 같지만 진담이다. 역시 인생은 기술이야.
이제 슬슬 노화된 몸이 신경 쓰이시지만 어쨌거나 평화(?)롭게 일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할머니. 그런데 이 할머니가 두 남자를 만나며 이 평화로운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연태 고량도 그래. 특히 잔을 보면, 그 쪼끄만한 잔에 뭘 넣냐 싶지만 마셔보면 그게 답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흔히 먹는 소주잔에 먹으면 그 날은 그냥 없는 날이다. 어느 누가, 방금 지하철에서 내린, 계단을 오르내리기에도 힘겨워 보이는 할머니를 전문 살인 청부업자로 보겠느냔 말이다.
그런 사소한 일상의 전복이 좋다. 좋은 작품은 나를 상상하게 만든다. 작은 일들, 일상적인 사건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게 한다. 지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혹은 이어폰을 끼고 지나가는 여인을 보면서 그들도 혹시..., 라는 엉뚱하면서도 사실적인 상상을 돋워낸다. 아가미도 그랬고, 구병모 작가는 아마 그런 능력이 탁월한 것이겠지.
그래서 그 할머니와 두 남자는 어케 되느냐면, 연태고량을 먹은 뒤를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향기롭고, 아주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40도가 넘는 도수처럼. 우리가 흔히 물로도 착각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하지만 마셔보면, ㅋㅋㅋㅋㅋ 그런 착각을 한 나를 때려주고 싶은 거 있잖아?
결론적으로 도수가 쎈 술을 마셨을 때 의외로 그 다음날이 말짱한 경우도 많고, 가끔은 잘못 마셨을 때 죽을 것 같을 때도 있을 테다. 그러니 파과에 대해서는 더 첨언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술도 권하고, 책도 권하는 그런 사회니까. 그리고 우리는 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쎈 술에 더더욱 끌리는 우리 스스로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