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청하
나이가 들면 들수록 확고해지는 것이 취향이다. 달릴 취, 향할 향. 분명 제가 좋아하는 쪽으로 달린다는 뜻인데, 내 취향은 어째 나이가 들수록 싫어하는 것만 뚜렷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이만을 무기로 내 능력을 깎아내리려는 사람이 싫고, 어찌나 입이 가벼운지 조그만 말실수라도 했다간 그대로 그 다음 날 회사 내에 짜아, 하니 소문이 퍼지게 하는 사람도 싫고, 선택적으로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서만 고집을 부려 제 하고픈 대로 모조리 해버리는 사람도 싫다.
참 웃기지. 싫은 사람은 요목조목 따져가며 다양한 방면으로 싫은데, 좋은 사람은 그냥 좋다. 아니 그리고 살면서 느끼는 일이겠지만 싫은 사람은 그렇게도 많은데 좋은 사람은 그 반에 반도 안 되는 것 같다. 술은, 이렇게나 좋은 술이 많은데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최근 내 취향은 청하다. 요새 날이 추워져서 그런지, 뜨끈하게 데운 국물에 청하 마시는 게 너무 그립다. 여름이 맥주라면, 겨울엔 소주지. 한국에 있을 때 자주 갔던 순대국밥 집에서는 어찌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지, 나와, 함께 가는 언니 얼굴만 봐도 아저씨가 대신 주문을 넣어주셨다. 술국 하나, 청양고추, 마늘 많이 썰어서, 거기다 청하 한 병. 둘이서 여섯 병 정도 마시고 나오면 얼굴이 잔뜩 마신 술 때문인지 뜨겁게 계속 데워주신 술국 덕인지 빨개져서 종종 걸음으로 왔던 추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 말하다 보니 또 먹고 싶네, 술국에 청하.
청하는 맛이 독특하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맑다. 민들레대포보다는 더 진한 맛인데, 이쪽도 아주 좋아하는 맛이다. 마늘을 잔뜩 올린 술국 한 숟가락에 청하 한잔을 쭉 들이키면, 세병이고 네 병이고 끝없이 들어갈 것 같다. 이 달큰한 맛은 어느 쪽인가 하면, 처음 시작하는 어설프고도 어린 관계의 형태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서 연애소설을 고르면 좋을까, 가벼운 추리물을 고르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골랐다. 그야말로 청춘! 고교생!을 온 몸으로 외치는 듯한 제목과 내용이지만 실제로 책을 읽으면 내가 말하는 그 ‘어설프고도 어린, 그러나 언제든 성장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처음 읽었을 때 ‘아, 이 책은 내 취향 저격이다’라고 조그맣게 속삭이게 하는. 그래서 지금도 나는 친구들에게 무난한 책을 추천할 때 이 책을 추천한다. 술은? 청하는 무난하다고는 보기 어려워 취향을 보고 추천한다지만.
맛 자체가 엄청 맑다! 투명하다! 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들짜근한 맛이 혀의 미각을 온전히 곱씹게 하는 단 맛이다. 청춘의 조각을 그대로 담아낸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도, 우리가 미화시켜 그리워하는 그저, 맑고 청아한 순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어찌됐건, 주인공인 니시와키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는 타인에게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한 관계에 있으니까.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에는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지만 실제로 그런 걸 어쩌랴. 여담으로 내가 이 책을 추천해줄 때마다 친구들이 피크닉이라는 말을 곡해할 때가 있는데 그런 관계는 아니다ㅋㅋㅋㅋㅋㅋ
밤의 피크닉은, 이 두 사람이 속해있는 고등학교인 북고에서 수학여행 대신 진행하는 1박 2일의 행사에서 따온 제목이다. 말 그대로, 밤새 내내 친구들과 걷는 행사. 걷는 건 좋아하는 편이지만 밤새 걷는다는 건, 글쎄 어떨까. 또 모르겠다. 지금도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는 건 싫어하지 않으니 친구와 함께 걸으니 조금 더 힘내서 걷게 될는지. 그래서 그 밤을 걸어가는 행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책이라 밤의 피크닉이라 지은 거라 추측해본다. 그리고 아주 어울리는 제목이기도 하고.
그건 무척이나 인상 깊고도 놀라운 일이다. 걷는다는 행위는 우리가 매일 하는 것이건만 밤새, 친구들과 더불어 걷는다는 건 왜 그리 특별한 걸까. 그 순간에는 전혀 놀랍지 않은 일들, 친구들과 야자 시간에 떠드는 것, 석식을 먹고 매점에 달려가던 일들, 유달리 특별하다거나 놀라운 일들이었던 것도 아니건만, 학창시절에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워지고 아름다워진다. 어쩌면, 내가 청하를 좋아하는 것도 단순히 그 맛이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청하를 마셨을 때의 그 기억들이 그립고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다 보니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청하를 좀 참아보려 한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여기서와 다를 일이 없는 일들을 반짝거리는 순간으로 만들어주는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그리하여 혀를 아련하게 만드는 달콤함과, 재잘거리며 늘어놓는 수다가 더욱 맛있는 청하는 이제 내가 내년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찾게 될 밤의 피크닉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