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함께하는 리뷰

허삼관 매혈기-이과두주

habanera_ 2019. 11. 6. 22:29

 중국 소설은 잘 모르는 편이었다. 뭐 다른 나라 소설이라고 더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중국은 우리나라,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3국에 속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일본과는 다르게 이국적인 풍경과 느낌을 주는 곳이었고, 그래서인지 중국 소설이 늘어서 있는 서가는 쉽사리 손길이 닿지 않는 칸이었다. , 그랬던 내가 지금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니, 세상일 누구도 알 수 없다지만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읽었던 중국 소설은 무엇이었더라, 초등학생 때 읽은, 대지를 쓴 펄 벅은 중국인이 아니니 제외다. 조금 더 시간을 세어보자면 중학교 시절 친구가 빌려준 샨사의 측천무후도 중국 소설의 맛을 보여준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였던 금병매는, ㅋㅋㅋㅋㅋㅋ 그건 당최 무슨 술이랑 어울리는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제대로 읽어본 중국 소설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그나마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읽어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꼽아야 할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읽음으로서 중국이 가진 저력이랄까,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으므로. 위화의 이 책을 고등학교 후반부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읽었던 홍소육-홍샤오로우에 관한 묘사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군침을 삼키게 한다.

 

 

 아, 물론 당연히 이 책은 요리 소설은 아니다. 다만 위화의 글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여러 개의 소도구 중 하나가 바로 상황에 관련한 자세한 묘사였기에 조금 설명해보았다. 참고로 저 구절을 본 이후로 줄곧 홍소육을 먹어보길 꿈꾸었는데, 중국으로 출장을 와 먹게 된 홍소육은 과연 맛있기는 하였으나 역시 상상 속의 그 맛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는 게 하나 남은 아쉬움이다. 그 정도로 훌륭한 묘사가 있는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럼 홍소육과 잘 어울리는 술에는 뭐가 있을까. 여기서 허삼관은 피를 팔 때마다 부추간볶음과 황주 두 냥을 마시는데, 백주만 즐겨 마시는 나로서는 아직 황주를 못 찾아봤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 책과 잘 어울리는 술을 고르라면 이과두주를 고르련다.

 

 

 한국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이 사마셨던지, 친구들이 농담으로 내 집에는 구급 용품 대신에 이과두주가 있다고 했고, 물 대신에 맥주가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과두주는 내 스트레스 해소 응급 처치용이었고,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로 사놓아야 하는 술이었다. 왜 그렇게도 좋아했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솔직하게 말하면 56도의 높은 도수와 맑은 향기, 그리고 싼 가격의 훌륭한 콜라보 덕이 아니었나 싶다.

 

 

 술이 절대 강한 편은 아닌데 어중간하게 약하지도 않은 편이라 혼자 술을 마실 때에는 맥주를 5-6캔을 비워댔다. 마셔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돈도 돈이지만 2-3리터의 맥주를 먹고 있노라면 심한 현타가 오는 스스로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과두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중국, 심도 있는, 꽉 짜여진, 그러나 서민적인, 이라고 하는 여러 개의 키워드에 딱 맞아 떨어지는 술은 바로 이 이과두주밖에는 없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슬픔 뒤에 찾아오는 폭소다. 허삼관의 처지가 매순간 마다 비참함과 안타까움만을 열거한 불행 포르노는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의 나약한 모습이 나올 때마다 독자는 함께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허삼관의 시원스러운 대거리에 읽던 나도 모르게 비싯 배어나오는 웃음을 억누르게 되거든. 목구멍을 넘어갈 때까지는 숨구멍을 꽈악 막는 이과두주도 내시경처럼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뱃속을 뜨겁게 데우는 그 취기가 즐거운 것처럼, 뭐 그런 거지.

 

 

 세상 일이 어떻게 제 마음대로 돌아갈까. 누군들 돈을 벌고 싶지 않으며, 누군들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하고 싶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세상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불행한 것도 아니다.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세상에 대고 소리도 질러보고, 사람들에게 비웃음도 받아보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일 앞에서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나의 가족을 지키려는 허삼관의 순수하고 뜨거운 모습을 읽으며 이과두주가 든 조그만 잔을 비우다보면 뱃속을 따끈하게 데우는 취기에 오늘도 하루, 더 나아가겠구나, 나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러니 다들 오늘 하루도, 나를 잡아먹는 거대한 세상 앞에서도 소리 없는 욕지거리를 날리며 퇴근 후의 술 한 잔을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