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이과두주
중국 소설은 잘 모르는 편이었다. 뭐 다른 나라 소설이라고 더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중국은 우리나라,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3국에 속한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일본과는 다르게 이국적인 풍경과 느낌을 주는 곳이었고, 그래서인지 중국 소설이 늘어서 있는 서가는 쉽사리 손길이 닿지 않는 칸이었다. 참, 그랬던 내가 지금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니, 세상일 누구도 알 수 없다지만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읽었던 중국 소설은 무엇이었더라, 초등학생 때 읽은, 대지를 쓴 펄 벅은 중국인이 아니니 제외다. 조금 더 시간을 세어보자면 중학교 시절 친구가 빌려준 샨사의 측천무후도 중국 소설의 맛을 보여준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였던 금병매는, ㅋㅋㅋㅋㅋㅋ 그건 당최 무슨 술이랑 어울리는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제대로 읽어본 중국 소설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그나마 머리가 좀 크고 나서야 읽어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꼽아야 할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읽음으로서 중국이 가진 저력이랄까,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으므로. 위화의 이 책을 고등학교 후반부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 읽었던 ‘홍소육-홍샤오로우’에 관한 묘사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군침을 삼키게 한다.
아, 물론 당연히 이 책은 요리 소설은 아니다. 다만 위화의 글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여러 개의 소도구 중 하나가 바로 상황에 관련한 자세한 묘사였기에 조금 설명해보았다. 참고로 저 구절을 본 이후로 줄곧 홍소육을 먹어보길 꿈꾸었는데, 중국으로 출장을 와 먹게 된 홍소육은 과연 맛있기는 하였으나 역시 상상 속의 그 맛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는 게 하나 남은 아쉬움이다. 그 정도로 훌륭한 묘사가 있는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럼 홍소육과 잘 어울리는 술에는 뭐가 있을까. 여기서 허삼관은 피를 팔 때마다 부추간볶음과 황주 두 냥을 마시는데, 백주만 즐겨 마시는 나로서는 아직 황주를 못 찾아봤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 책과 잘 어울리는 술을 고르라면 이과두주를 고르련다.
한국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이 사마셨던지, 친구들이 농담으로 내 집에는 구급 용품 대신에 이과두주가 있다고 했고, 물 대신에 맥주가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과두주는 내 스트레스 해소 응급 처치용이었고,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로 사놓아야 하는 술이었다. 왜 그렇게도 좋아했느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솔직하게 말하면 56도의 높은 도수와 맑은 향기, 그리고 싼 가격의 훌륭한 콜라보 덕이 아니었나 싶다.
술이 절대 강한 편은 아닌데 어중간하게 약하지도 않은 편이라 혼자 술을 마실 때에는 맥주를 5-6캔을 비워댔다. 마셔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돈도 돈이지만 2-3리터의 맥주를 먹고 있노라면 심한 현타가 오는 스스로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과두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중국, 심도 있는, 꽉 짜여진, 그러나 서민적인, 이라고 하는 여러 개의 키워드에 딱 맞아 떨어지는 술은 바로 이 이과두주밖에는 없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슬픔 뒤에 찾아오는 폭소다. 허삼관의 처지가 매순간 마다 비참함과 안타까움만을 열거한 불행 포르노는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의 나약한 모습이 나올 때마다 독자는 함께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허삼관의 시원스러운 대거리에 읽던 나도 모르게 비싯 배어나오는 웃음을 억누르게 되거든. 목구멍을 넘어갈 때까지는 숨구멍을 꽈악 막는 이과두주도 내시경처럼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뱃속을 뜨겁게 데우는 그 취기가 즐거운 것처럼, 뭐 그런 거지.
세상 일이 어떻게 제 마음대로 돌아갈까. 누군들 돈을 벌고 싶지 않으며, 누군들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하고 싶지 않을까.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세상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불행한 것도 아니다.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세상에 대고 소리도 질러보고, 사람들에게 비웃음도 받아보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일 앞에서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나의 가족’을 지키려는 허삼관의 순수하고 뜨거운 모습을 읽으며 이과두주가 든 조그만 잔을 비우다보면 뱃속을 따끈하게 데우는 취기에 오늘도 하루, 더 나아가겠구나, 나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러니 다들 오늘 하루도, 나를 잡아먹는 거대한 세상 앞에서도 소리 없는 욕지거리를 날리며 퇴근 후의 술 한 잔을 기다려보자.